이 글은 Claude Opus 4.8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손패를 먼저 비우는 자가 이긴다#

카드게임에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포커처럼 좋은 조합을 만들어 겨루는 게임, 브리지나 스페이드처럼 정해진 수의 트릭을 따내는 게임, 그리고 손에 든 카드를 가장 먼저 다 털어내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 있습니다. 마지막 유형을 보드게임 용어로 셰딩 게임(shedding game) 이라 부르고, 그중에서도 “이전 사람이 낸 것보다 더 센 조합을 내야만 한다"는 규칙을 가진 하위 갈래를 클라이밍 게임(climbing game), 우리말로는 흔히 대부호류(大富豪類) 라고 부릅니다.

이 글에서는 대부호류 게임이 공통으로 가진 특징과 계보를 살펴보고, 원조 격인 일본의 대부호(大富豪), 리처드 가필드가 디자인한 달무티(The Great Dalmuti), 그리고 국산 타일 게임 렉시오(Lexio) 를 소개한 뒤, 이 계열 전체를 관통하는 전략을 정리하겠습니다.


클라이밍 게임이란 무엇인가#

핵심 메커니즘#

대부호류 게임은 이름은 제각각이어도 뼈대는 거의 같습니다.

  • 선(先)이 조합을 낸다. 한 명이 싱글(1장), 페어(같은 숫자 2장), 트리플(3장) 같은 조합을 바닥에 냅니다.
  • 더 세게 받거나, 패스한다. 다음 사람은 같은 장수의 더 높은 조합만 낼 수 있습니다. 못 내거나 안 내면 “패스"입니다. 페어에는 페어로, 트리플에는 트리플로 받아야 하며,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 모두 패스하면 판이 리셋된다. 마지막으로 카드를 낸 사람이 승자가 되어, 다음 판을 새로 시작하는 리드권(control) 을 가져갑니다.
  • 손패를 먼저 비운 순서대로 등수가 정해진다. 가장 먼저 턴 사람이 1등,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꼴찌입니다.

보드게임긱(BoardGameGeek)에서는 이 “더 센 조합으로 받아 올라간다"는 메커니즘을 Ladder Climbing(사다리 오르기) 이라고 분류합니다. 사다리를 한 칸씩 밟고 올라가듯 조합의 세기가 점점 높아지는 모습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신분과 카드 교환#

대부호류를 다른 셰딩 게임과 구별 짓는 결정적 특징은 신분(계급) 시스템 입니다.

한 판이 끝나면 등수에 따라 신분이 부여됩니다. 1등은 부자(대부호), 꼴찌는 빈민이 되는 식입니다. 그리고 다음 판을 시작하기 전에 가난한 쪽이 부유한 쪽에게 가장 좋은 카드를 상납(조공) 하고, 부자는 대신 필요 없는 카드를 내려줍니다.

이 규칙 때문에 대부호류는 단순한 운 게임이 아니라 “이긴 사람은 계속 유리해지고, 진 사람은 계속 불리해지는” 계급 재생산의 구조를 갖게 됩니다. 동시에 이를 뒤집는 혁명(revolution) 장치가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게임 안에 작은 사회 풍자가 담겨 있는 것이 이 계열의 묘미입니다.

계보: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서양으로#

이 계열의 뿌리는 중국의 쟁상유(争上游, Zheng Shangyou) 계열 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먼저 위로 올라간다"는 뜻 그대로, 손패를 먼저 비우는 것을 겨루는 게임입니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지주(斗地主, Dou Dizhu) 이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것이 바로 대부호(大富豪) 입니다.

서양에는 20세기 후반 President / Scum / Asshole 등의 이름으로 퍼졌습니다. 모두 “1등은 대통령, 꼴찌는 밑바닥"이라는 신분 규칙을 그대로 가진, 같은 계열의 게임입니다.

graph LR
    A["争上游<br/>(쟁상유, 中)"] --> B["斗地主<br/>(투지주, 中)"]
    A --> C["大富豪 / 大貧民<br/>(대부호, 日)"]
    C --> D["President / Asshole<br/>(西)"]
    A --> E["Tichu, 달무티,<br/>렉시오 등 변형"]
    style A fill:#FFD700,color:#000000
    style B fill:#87CEEB,color:#000000
    style C fill:#90EE90,color:#000000
    style D fill:#FFB6C1,color:#000000
    style E fill:#DDA0DD,color:#000000

원조 격, 대부호(大富豪)#

일본에서 국민 카드게임 수준으로 널리 즐기는 대부호는 대빈민(大貧民)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시작점을 부자에 두느냐 빈민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 같은 게임입니다.

기본 규칙#

  • 구성: 표준 52장 트럼프(조커 포함하는 변형도 많음), 보통 3~7명이 즐깁니다.
  • 카드 세기: 기본적으로 3이 가장 약하고 2가 가장 강합니다. 즉 3 < 4 < ... < K < A < 2 순서입니다.
  • 낼 수 있는 조합: 싱글, 페어, 트리플, 포카드(4장), 그리고 지역 룰에 따라 계단(階段, 같은 무늬 연속 숫자) 을 냅니다.
  • 목표: 손패를 가장 먼저 비우면 그 판의 1등입니다.

대부호를 대부호답게 만드는 로컬 룰#

대부호의 진짜 재미는 지역·모임마다 다르게 채택하는 로컬 룰 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 혁명(革命): 포카드(같은 숫자 4장)를 내면 이후 카드의 강약 순서가 통째로 뒤집힙니다. 약했던 3이 가장 세지고, 강했던 2가 가장 약해집니다. 강한 카드를 잔뜩 쥐고 있던 부자에게는 재앙 같은 규칙입니다.
  • 8 자르기(8切り): 8을 내면 그 즉시 판이 리셋되고, 낸 사람이 다시 리드권을 가집니다. 위기 탈출용 카드로 요긴합니다.
  • 묶기(縛り, 시바리): 같은 무늬가 연달아 나오면 그 판 동안 그 무늬로만 받을 수 있게 무늬가 고정됩니다.
  • 스페이드 3 반칙(スペ3返し): 가장 강한 조커 싱글을, 가장 약한 카드인 스페이드 3으로 되받을 수 있는 예외 규칙입니다.

신분과 조공#

한 판이 끝나면 순서대로 대부호 / 부호 / (평민) / 빈민 / 대빈민 의 신분이 붙습니다. 다음 판 시작 전:

  • 대빈민 → 대부호: 가장 강한 카드 2장 을 바치고, 대부호는 필요 없는 카드 2장을 내려줍니다.
  • 빈민 → 부호: 가장 강한 카드 1장 을 바치고, 부호는 아무 카드 1장을 내려줍니다.

이 조공 규칙이 계급을 고착화하고, 혁명이 그것을 한 방에 뒤집는 긴장 구조가 대부호의 핵심입니다.


달무티 (The Great Dalmuti)#

달무티 는 매직 더 개더링을 만든 리처드 가필드(Richard Garfield)가 디자인해 1995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서 출시한 게임입니다. 대부호의 뼈대에 중세 계급 사회 라는 테마를 입혀 전용 덱으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4~8명일 때 특히 잘 굴러갑니다.

전용 80장 덱#

일반 트럼프가 아니라 80장 전용 카드 를 씁니다.

  • 숫자 1부터 12까지 있는데, 숫자가 곧 장수 입니다. 1은 1장, 2는 2장, … 12는 12장. (1+2+…+12 = 78장)
  • 여기에 광대(Jester) 2장 을 더해 총 80장입니다.
  • 숫자가 작을수록 강합니다. 1이 최강(대달무티), 12가 최약(농노)입니다. 즉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신분(1)은 세상에 하나뿐이고, 가장 낮은 신분(12)은 흔합니다. 계급 사회를 카드 매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 광대 는 단독으로 내면 가장 약한 13 취급이지만, 다른 숫자와 함께 내면 그 숫자의 와일드카드 로 쓰입니다.

신분과 세금(taxation)#

플레이어들은 등수에 따라 대달무티 → 소달무티 → 상인 → … → 소농노 → 대농노 순으로 자리에 앉습니다. 매 판 시작 전 세금(taxation) 이 부과됩니다.

  • 대농노 는 자기 손에서 가장 좋은(숫자가 낮은) 카드 2장 을 대달무티에게 바치고, 대달무티는 아무 카드 2장을 내려줍니다.
  • 소농노 는 가장 좋은 카드 1장 을 소달무티에게 바치고, 소달무티는 1장을 내려줍니다.

혁명(Revolution)#

달무티의 백미는 혁명 규칙입니다.

  • 혁명: 어떤 플레이어가 광대 2장을 모두 손에 쥐면, 세금 징수를 취소 시킬 수 있습니다. (모임에 따라 광대 1장만으로도 농노가 혁명을 외칠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 대혁명(Greater Revolution): 하필 그 광대 2장을 대농노 가 쥐고 있으면, 자리를 통째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대농노가 대달무티가 되고, 대달무티가 대농노로 굴러떨어집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이 광대 두 장으로 판을 엎는 순간이야말로 달무티라는 게임이 노리는 카타르시스입니다.


렉시오 (Lexio)#

렉시오 는 카드 대신 플라스틱 타일 로 즐기는 국산 클라이밍 게임입니다. 마작처럼 손맛 좋은 타일을 쓰면서, 포커 족보를 클라이밍 규칙에 얹은 독특한 게임입니다.

구성과 숫자 서열#

  • 타일: 숫자 1~15가 4가지 색(빨강·노랑·초록·파랑) 으로 각각 존재해 총 60개입니다. 색마다 해·별·달·구름 같은 고유 문양이 있습니다.
  • 인원별 사용 범위: 3명이면 1~9, 4명이면 1~13, 5명이면 1~15까지 씁니다.
  • 숫자 서열: 여기서 렉시오의 개성이 드러납니다. 가장 약한 것이 3이고, 3 < 4 < ... < 15 < 1 < 2 순으로 강해집니다. 2가 최강, 1이 그다음 입니다.
  • 머니(칩): 점수 정산에 쓰는 머니 칩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조합과 족보#

낼 수 있는 조합은 1장, 2장, 3장, 5장 입니다. (4장은 낼 수 없습니다.) 5장짜리 조합을 메이드(made) 라 부르며, 포커와 똑같은 족보를 쓰되 강약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약한 것부터 강한 것 순입니다.

  1. 스트레이트 (색 무관 연속된 5개 숫자)
  2. 플러시 (같은 색 5개)
  3. 풀하우스 (트리플 + 페어)
  4. 포카드 + 1 (같은 숫자 4개 + 아무 1개)
  5.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색 연속 5개)

싱글에는 싱글, 페어에는 페어로 받되, 메이드끼리는 종류가 달라도 족보 서열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풀하우스든 어떤 플러시든 이깁니다.

정산과 승리 조건#

한 명이 타일을 모두 털면 그 판이 끝납니다. 그러면 남은 타일 개수 차이만큼 다른 모든 플레이어에게 머니를 지불합니다. 특히 손에 강력한 2 타일 이 남아 있으면 배수로 물어내야 하므로(첫 2는 2배, 둘째 2는 3배 …), 강한 타일을 못 털고 남기는 것이 뼈아픈 손해가 됩니다. 정해진 판 수를 채우거나 누군가 머니가 바닥날 때까지 진행합니다.

렉시오의 매력은 “손패를 먼저 비운다” 는 목표와 “강한 타일을 남기면 손해” 라는 정산 구조가 맞물려, 단순히 오래 버티기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잘 털어내는 것 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대부호류를 관통하는 전략#

게임마다 이름과 소품은 달라도, 이기는 원리는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1. 나온 카드를 세라 (카드 카운팅)#

대부호류의 정보는 “무엇이 이미 나왔는가” 입니다. 강한 카드(대부호의 2, 렉시오의 2, 달무티의 1)가 몇 장 나왔는지 추적하면, 내 손의 카드가 지금 사실상 최강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최강 카드를 쥐고 있다는 확신은 곧 원할 때 리드권을 가져올 수 있다 는 뜻입니다.

2. 리드권(control)이 곧 주도권이다#

모두를 패스시키고 새 판을 여는 리드권은 이 계열에서 가장 값진 자원입니다. 리드권이 있으면 내가 유리한 장수·조합으로 판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페어가 많으면 페어로, 싱글이 애매하면 강한 싱글로 판을 몰아가는 식입니다. 강한 카드는 이 리드권을 되찾아 오기 위해 아껴 둡니다.

3. 강한 조합을 언제 쪼갤 것인가#

포카드나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은 강한 조합은 든든하지만, 끝까지 통째로 들고 있으면 정작 손패가 안 줄어드는 함정에 빠집니다. 특히 렉시오처럼 남은 타일이 손해로 이어지는 게임에서는, 강한 조합을 적절히 쪼개어 흘려보내며 손패를 꾸준히 줄이는 균형 감각이 중요합니다.

4. 최강 카드와 폭탄은 엔드게임용으로#

대부호의 2, 8, 조커, 달무티의 광대, 렉시오의 2처럼 판을 끊거나 뒤집는 카드 는 초반에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손패가 얼마 안 남은 종반에, “이 한 방으로 리드권을 잡고 남은 패를 원턴에 털어낸다"는 시나리오를 위해 남겨 두는 것이 정석입니다. 혁명(포카드)과 대혁명(광대 2장)도 마찬가지로, 터뜨리는 타이밍 이 곧 승부처입니다.

5. 신분에 맞는 운영: 부자와 빈민의 셈법#

  • 부자(대부호·대달무티) 일 때는 조공으로 받은 강한 카드를 엔드게임 자원 으로 관리하고, 내려줄 카드는 “쪼개져 있어 어차피 안 쓸 약한 카드"로 최소한만 손해 보게 고릅니다.
  • 빈민(대빈민·대농노) 일 때는 최강 카드를 상납하고 시작하므로 정면 승부로는 불리합니다. 대신 혁명 가능성(포카드·광대 수집) 에 판돈을 걸거나, 페어·트리플 등 장수 싸움 으로 강한 싱글 위주 상대의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편이 낫습니다.

6. 혁명은 양날의 검이다#

혁명은 판을 뒤집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내 손패가 혁명 이후 정말 유리해지는지 를 먼저 계산해야 합니다. 약한 카드가 많아 혁명 후 강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남을 살려주는 자충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질 것 같을 때, 약패가 두터울 때” 터뜨리는 것이 혁명의 정석입니다.


마치며#

대부호, 달무티, 렉시오는 카드냐 전용 덱이냐 타일이냐, 그리고 조공이냐 세금이냐 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먼저 털어내고, 신분을 얻고, 혁명으로 뒤집는다” 는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들입니다. 하나의 규칙 감각을 익혀 두면 나머지는 금방 손에 익습니다.

셋 중 무엇으로 입문하든, 오늘 정리한 여섯 가지 전략(카드 세기, 리드권 확보, 조합 쪼개기, 엔드게임 카드 관리, 신분별 운영, 혁명 타이밍)을 떠올리며 한 판 돌려 보시길 권합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