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Claude Opus 4.7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들어가며: 축구 팬이 야구 중계를 처음 켰을 때#

손흥민 골을 보려고 EPL 새벽 중계를 챙겨 보던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출장을 다녀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텔에서 야구 보다가 진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한 번 던지고, 또 한 번 던지고, 자꾸 멈추고. 4시간 동안 점수가 5대 3이라고? 그게 끝이라고?”

그 친구는 NBA 플레이오프는 새벽 3시에도 챙겨 봅니다. 평균 109점 vs 105점이 1초 차이로 갈리는 그 긴장감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이 야구를 켜면 정말로 이렇게 느낍니다.

  • “왜 이렇게 자주 멈추지?”
  • “왜 이렇게 길지?”
  • “왜 9명이나 있는데 점수가 안 나지?”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야구 팬에게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면 정확히 같은 단어로 답이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그게 매력이에요.”

이 시리즈는 축구나 농구를 좋아하지만 야구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분들을 위해 썼습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는지, 그 이상함이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을 바칠 만한 매력이 되는지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편은 다음 주제를 다룹니다.

  • Part 1 (이번 글): 야구라는 스포츠가 다른 스포츠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 Part 2: 한 팀 안의 두 직업, 투수와 타자
  • Part 3: 매 타석은 체스 한 판 — 1대1 매치업의 미시 세계
  • Part 4: 데이터의 천국 — 왜 너드들이 야구에 미치는가

이번 1편의 결론을 미리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야구는 시간을 멈춘 채로 1대1 대결을 무한히 반복하는, 메이저 스포츠 중에서 유일하게 그렇게 설계된 게임입니다.

이 한 줄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상함: 시간이 흐르지 않는 스포츠#

다른 메이저 스포츠를 떠올려 보면 모두 시계가 돌아갑니다.

스포츠 경기 시간 결정 방식
축구 90분 + 추가시간 시간 종료 시점의 점수
농구(NBA) 48분 (4쿼터) 시간 종료 시점의 점수
미식축구(NFL) 60분 (4쿼터) 시간 종료 시점의 점수
아이스하키(NHL) 60분 (3피리어드) 시간 종료 시점의 점수
야구(MLB) 9이닝 27아웃이 잡힐 때까지

야구만 단위가 다릅니다. 시간이 아니라 사건(아웃) 입니다.

이게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게임의 결은 완전히 다릅니다. 축구에서 1대0으로 앞서고 있는 팀이 89분에 추가시간 5분을 받았다면 그건 사실상 끝난 경기입니다. 농구에서 12점 차이로 앞서고 4쿼터 1분이 남았다면 일반적으로는 승부가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야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격하는 팀이 27번째 아웃을 당하기 전까지 경기는 이론상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10점 차이로 지고 있어도 한 명만 안타를 치면 다음 타자에게 기회가 갑니다. 그 다음 타자가 또 안타를 치면 또 다음 타자에게 갑니다. 끝이 나려면 마지막 아웃을 잡아야만 합니다.

“9회말 2아웃"의 신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9회말 2아웃"이라는 말은 거의 종교에 가깝습니다.

2011년 월드시리즈 6차전, 텍사스 레인저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7대 5로 앞서며 9회말을 맞이했습니다. 2아웃을 잡았고, 2스트라이크까지 잡았습니다. 하나만 더 잡으면 텍사스 구단 역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이었습니다. 카디널스의 데이비드 프리스(David Freese)는 풀카운트에서 2점 적시 3루타를 쳐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10회말 텍사스가 다시 2점을 앞서갔습니다. 다시 2아웃까지 잡았습니다. 카디널스의 랜스 버크먼(Lance Berkman)이 다시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11회말, 데이비드 프리스는 끝내기 홈런을 쳤고 카디널스는 7차전에서 우승했습니다.

축구로 치면 “후반 종료 직전 2골 차로 이기다가 추가시간 5분 동안 동점이 되었고, 연장 전반 종료 직전 다시 2골 앞섰는데 또 동점이 되어, 결국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정해진 스포츠에서는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야구에서는 그런 일이 매년 일어납니다. 시즌 중 한 번이 아니라, 시즌 중 여러 번 일어납니다.

가장 긴 경기#

시간 제한이 없다는 건 정말로 없다는 뜻입니다.

MLB 정규 경기 최장 기록은 1984년 5월 8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밀워키 브루어스의 25이닝 경기로, 8시간 6분이 걸렸습니다. 한 경기에 25이닝을 했습니다. 9이닝 경기를 거의 세 번 한 셈입니다. 이 경기는 17이닝까지 갔다가 우천으로 중단됐고, 다음날 8이닝을 더 한 끝에 끝났습니다.

마이너리그까지 포함하면 더 극단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1981년 4월 18일 트리플A의 포타킷 레드삭스(Pawtucket Red Sox)와 로체스터 레드윙스(Rochester Red Wings)는 33이닝, 8시간 25분짜리 경기를 했습니다. 자정을 넘기고 새벽 4시 9분에 32이닝을 마치고 일단 중단했고, 두 달 뒤 6월 23일에 33회를 추가로 진행해 끝냈습니다. 결국 한 경기를 위해 두 달이 걸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시간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MLB는 2023년부터 투구 제한 시간 도입과 연장전 무사 2루 룰 등으로 경기 시간을 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9이닝 안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본질은 그대로입니다.)

시간 대신 사건이 단위인 게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건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축구에서는 골이 들어가도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농구에서는 점수가 매 분마다 바뀝니다. 그래서 이 스포츠들은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게임입니다.

야구는 다릅니다. 매 투구가 명확한 단위입니다. 한 번 던지면 결과가 나옵니다 (스트라이크, 볼, 파울, 인플레이). 결과가 나오면 멈춥니다. 다시 자세를 잡고, 또 던집니다. 이 멈춤이 일어나는 동안 양 팀 더그아웃에서는 다음 수를 계산합니다. 코치는 사인을 보내고, 포수는 구종을 정하고, 타자는 노림수를 결정합니다.

축구가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재즈라면, 야구는 한 수 한 수 깊이 생각하는 바둑에 가깝습니다. 둘 다 훌륭한 음악과 게임이지만, 결이 다릅니다.


두 번째 이상함: 공격과 수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건 야구를 한참 봐도 의외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차이입니다. 너무 당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메이저 스포츠를 떠올려 보면 모두 공수 전환이 게임의 핵심입니다.

  • 축구: 공을 빼앗는 순간 공격이 시작됨. 1초도 안 되어 공수가 바뀜.
  • 농구: 리바운드 잡는 순간 속공. 공수 전환 속도가 경기력을 결정.
  • 미식축구: 인터셉트 한 번에 공수가 뒤집힘.
  • 아이스하키: 퍽을 빼앗는 순간 즉시 역습.

이 스포츠들은 공격하는 사람이 곧 수비하는 사람입니다. 메시도 빼앗기면 수비를 해야 하고, 르브론도 슛이 빗나가면 자기 진영으로 뛰어가야 합니다.

야구는 공격과 수비가 시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한 이닝의 한쪽 공격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공수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팀이 공격할 때 상대 팀 야수 9명은 그라운드에 나와 있고, 우리 팀 야수 9명은 더그아웃에 앉아 있습니다.

분리가 만드는 극단적 분업#

이 구조 때문에 야구에서는 다른 어떤 스포츠도 흉내 낼 수 없는 극단적인 분업이 가능합니다.

지명타자(DH, Designated Hitter): 투수 대신 타격만 전담하는 선수입니다. 수비는 한 번도 안 합니다. 9회 내내 타석에만 들어섭니다. MLB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73년부터, 내셔널리그에서도 2022년부터 도입된 제도입니다. 축구로 치면 “공격만 하고 수비는 절대 안 하는 선수가 정식 포지션으로 인정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스포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무리투수(Closer): 9회에만 등판해서 한 이닝만 던지는 투수입니다. 그 한 이닝을 위해서 경기 내내 불펜에 앉아 있다가, 8회말이 되면 몸을 풀고, 9회초에 등판해서 1이닝 던지고 끝납니다. 매리아노 리베라(Mariano Rivera)는 19년 커리어 동안 통산 652세이브를 기록했는데, 그동안 거의 모든 등판이 1이닝짜리였습니다. 한 시즌에 70경기에 등판해서 70이닝을 던지고 끝나는 선수입니다.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LOOGY, Left-handed One Out GuY): 한때는 좌타자 한 명을 잡기 위해서만 등판하는 좌투수가 있었습니다. 한 타자를 상대하고 바로 교체됩니다. (2020년 MLB 룰 개정으로 최소 3타자 또는 이닝 종료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겨 사라졌지만, 그 정도로 분업이 극단화됐던 시절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대주자(Pinch Runner): 발이 빠른 선수가 베이스에 나가 있는 다른 선수와 교체됩니다. 본인은 타격 한 번 안 하고 그저 베이스에서 도루나 득점만 노립니다. 1974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허브 워싱턴(Herb Washington)은 한 시즌 동안 105경기에 출전해 단 한 번도 타석에 들어선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수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대주자로만 뛰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타격 0번, 수비 0번, 도루 30개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분업이 가능한 건 공격 시간과 수비 시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에서는 “공격만 하는 선수"를 두면 수비할 때 1명이 빠지는 셈이라 11대10이 됩니다. 야구에서는 우리 팀이 공격할 때 어차피 야수들은 더그아웃에 앉아 있으므로, “타격만 잘하는 사람"을 9번째 타자로 끼워 넣어도 수비에 손해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명확히 기록된다#

공수 분리는 부수적으로 또 한 가지 결과를 만듭니다. 모든 행동이 명확하게 한 명에게 귀속된다는 점입니다.

축구에서 골이 들어가면 그 공이 들어가기까지 패스에 관여한 선수가 5~6명입니다. 누구의 어떤 기여 덕분에 골이 들어갔는지를 데이터로 정확히 분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농구도 마찬가지로 화려한 어시스트, 스크린, 수비 회전이 얽혀 한 점이 만들어집니다.

야구는 다릅니다. 한 번 공이 던져지면 그 결과는 딱 두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투수와 타자. 공이 인플레이가 되어 야수가 잡으면 그 야수의 처리 결과가 추가로 기록됩니다. 모든 게 명확하게 한 사람씩에게 귀속됩니다. “이건 누구 덕에, 누구 탓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가 100년 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이 점은 4편에서 다시 깊이 다룰 예정입니다. 야구가 데이터의 천국이 된 가장 중요한 구조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 번째 이상함: 본질이 1대1 대결의 무한 반복이다#

이게 어쩌면 야구의 가장 본질적인 특이점입니다.

다른 스포츠를 다시 한번 떠올려 봅시다.

  • 축구는 22명이 한 공을 두고 동시에 움직입니다.
  • 농구는 10명이 한 공을 두고 동시에 움직입니다.
  • 미식축구는 한 플레이에 22명이 한꺼번에 부딪칩니다.
  • 럭비는 30명이 동시에 뒤엉킵니다.

야구는 어떨까요? 한 번에 그라운드 위에서 의미 있게 움직이는 사람은 단 두 명입니다. 투수 한 명, 타자 한 명. 나머지 야수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습니다. 공이 그쪽으로 오면 그제서야 움직입니다.

야구는 표면상 9대9의 단체 스포츠지만, 본질은 1대1 대결의 무한 반복입니다.

한 경기에 일어나는 1대1 대결의 횟수#

평균적인 MLB 경기를 숫자로 풀어 봅시다.

  • 9이닝, 양 팀 합쳐 18번의 공격
  • 한 이닝에 평균 4~5타자
  • 한 경기에 양 팀 합쳐 약 70~80타석
  • 한 타석에 평균 3.9구

곱하면 한 경기에 약 300번의 투구가 던져집니다. 모든 투구가 투수 한 명과 타자 한 명의 1대1 대결입니다. 그리고 그 300번의 1대1 대결이 사실상 한 경기의 모든 것입니다.

축구에서는 이런 1대1이 게임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메시 vs 수비수 한 명의 드리블 돌파는 축구의 한 장면일 뿐, 그것 자체로 게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농구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1대1 포스트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1대1입니다. 9회 27아웃, 평균 70~80타석, 약 300번의 투구가 모두 한 명의 투수와 한 명의 타자 사이의 일입니다.

1대1이 만드는 깊이#

이 1대1 구조가 만드는 매력은 다음 두 편(Part 2, Part 3)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주제입니다. 미리 살짝만 보여드리면 이렇습니다.

투수와 타자는 같은 종목 같은 팀에 있지만 사실상 완전히 다른 운동선수입니다. 동작도 다르고, 훈련법도 다르고, 평가하는 통계 지표도 다릅니다. 한 팀 안에 두 종류의 직업이 공존합니다. 다른 어떤 메이저 스포츠도 이런 구조가 아닙니다.

한 타석은 그 자체로 작은 체스 게임입니다. 12가지의 볼카운트(0-0부터 3-2까지), 좌투/우투 vs 좌타/우타의 매치업, 직전 타석에서 무엇을 던졌는지의 기억, 주자 상황에 따른 작전, 카운트별 노림수와 유인구. 한 번의 투구가 던져지기 전에 양 진영에서 수십 가지 변수가 계산됩니다.

이 모든 정교한 계산이 한 게임에 300번씩, 한 시즌에 162경기씩 반복됩니다.


정리: 야구가 그렇게 생긴 이유#

여기까지 정리하면 야구가 다른 스포츠와 다른 점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사건(아웃)이 게임의 단위입니다. 그래서 9회말 2아웃의 신화도, 25이닝 8시간 경기도 가능합니다.
  2. 공격과 수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DH, 마무리투수, 대주자 같은 극단적 분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이 명확히 한 사람에게 귀속됩니다.
  3. 본질이 1대1 대결의 무한 반복입니다. 한 경기에 약 300번의 1대1이 일어나고, 그 300번이 사실상 게임의 전부입니다.

축구나 농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야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야구가 잘못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른 카테고리의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멈춘 채로 1대1 대결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임. 이런 스포츠는 야구밖에 없습니다.

다음 편(Part 2)에서는 이 1대1 대결의 두 주인공, 투수와 타자라는 한 팀 안의 두 직업을 다룹니다. 한 명은 구속 90마일 안 되는 공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한 명은 통산 .338 타율로 19시즌을 뛰었습니다. 같은 팀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지만 거의 다른 운동선수에 가까운, 그 두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