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역대 대첩 TOP 5: 우리는 왜 이걸 보고 있을까
이 글은 Claude Opus 4.6 을 이용해 초안이 작성되었으며, 이후 퇴고를 거쳤습니다.
들어가며: 대첩이란 무엇인가#
야구에서 “명경기"라는 단어는 보통 양 팀이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좋은 투구와 좋은 타격, 좋은 수비가 어우러진 경기를 칭찬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KBO 팬들은 또 다른 종류의 “명경기"를 부르는 그들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대첩 입니다.
대첩은 칭찬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칭찬도 욕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묘한 헌사 입니다. 양 팀이 사이좋게 자멸하고, 볼넷과 폭투와 실책이 난무하며, 9회까지 가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런 경기. 보고 있으면 이게 프로 경기가 맞는지 의심이 들면서도, 또 묘하게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그런 경기. KBO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라는 자문과 함께 새벽까지 TV 앞을 떠나지 못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이 글은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그 빛나는(??) 대첩들 중 다섯 경기를 골라, 5위부터 1위까지 역순으로 소개해 보려 합니다. 읽다 보면 “아 맞다 이런 일도 있었지"라며 헛웃음이 나오실 수도, “내가 그날 직관 갔다가 마지막 지하철을 놓쳤지"라며 트라우마가 떠오르실 수도 있습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사전 양해: 본문에 등장하는 일부 점수, 이닝, 등판 투수 수 등의 세부 기록은 기억과 자료가 엇갈리는 경우가 있어 정확한 수치는 KBO 공식 기록이나 스탯티즈 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그날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가벼운 회고입니다. 또한 특정 팀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대첩의 본질은 언제나 양 팀이 함께 만들어낸다 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5위. 414 대첩 — 2026년 4월 14일, 대전 삼성 vs 한화#
이 글을 쓰는 시점 기준 바로 어제, 그러니까 2026년 4월 14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서 벌어진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시즌 첫 번째 맞대결은, KBO 사사구 역사를 36년 만에 갈아치우는 경기였습니다. 한화 투수진은 이 한 경기에서 무려 18개의 사사구 를 헌납했고, 이는 1990년 5월 5일 LG 트윈스가 기록했던 종전 17개를 넘어선 KBO 단일 경기 한 팀 최다 사사구 신기록 입니다. 36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건 점수판입니다. 삼성이 기록한 6득점의 내역이 이렇습니다. 적시타 0개. 밀어내기 볼넷 5개. 폭투 1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적시타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야구라는 종목에서 6점을 내는 데 안타로 점수를 내지 않는 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이 경기가 증명한 셈입니다. 그 와중에 양 팀 모두 수비 실책은 0개였다는 점이 유일하게 “프로야구다웠다"고 평가받는 슬픈 디테일입니다.
8회까지 5-1로 앞서고 있던 한화는, 9회 마무리를 자청한 김서현이 혼자서 사사구 7개를 헌납하면서 5-6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1이닝 7사사구. 이 숫자가 한 명의 마무리 투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어떤 시대의 종언처럼 느껴집니다. 결승타는 9회초 2사 만루에서 이해승의 밀어내기 볼넷 이었고, 그 직전 동점 점수도 최형우의 밀어내기 볼넷 이었습니다. 한화 김경문 감독의 “믿음의 야구"는 이날 한 야구 칼럼니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방임의 야구” 였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경기 종료 후 중계방송 해설위원의 코멘트가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볼넷이 많이 나왔다는 점은 경기, 리그에 건강한 장면이 아니기에 안타깝습니다.”
4시간 9분 동안 17,000명의 관중이 매진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서, 양 팀 팬들과 중계 화면 너머의 8개 구단 팬들 모두가 이 경기의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내가 야구를 잘못 보고 있나"를 자문했습니다. 36년 만의 신기록은 이런 식으로도 만들어지는 모양입니다.
4위. 709 대첩 — 2016년 7월 9일, 사직 LG vs 롯데#
2위에 올린 627 대첩이 2017년의 사직이라면, 1년 앞서 똑같은 사직구장에서 똑같은 두 팀이 똑같이 5시간이 넘는 막장 끝내기를 만들어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627 대첩은 이 경기의 속편 이었던 셈입니다. 2016년 7월 9일, 5시간 33분, 11회 연장, 롯데 13-12 LG. 양 팀 점수의 합은 25점. 양 팀 안타 수의 합은 34개. 한 경기 안에서 리드가 몇 번 뒤집혔는지 세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의 경기였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시작했습니다. 4회까지 LG가 5-2로 앞선 안정적인 흐름. 그리고 5회말, 무사 만루도 아닌 1사 만루 에서 김문호의 평범한 2루 땅볼이 나왔습니다. 누가 봐도 병살로 이닝 종료. 그런데 LG 2루수 정주현이 1루로 던진 송구가 빠졌습니다. 그 한 번의 송구 실책으로 이닝이 살아났고, 다음 타자 황재균의 안타로 한 점, 그 다음 강민호의 역전 쓰리런 으로 5-2가 단숨에 7-5가 되었습니다. 류제국의 자책점이 7점이 된 건 덤이었습니다(실책으로 이닝이 종료됐어야 했으나 기록은 그렇지 않아서요).
6회초, 이번엔 LG가 무사 1·2루 위기를 잡았고, 박용택 타석에서 롯데가 이명우를 올렸습니다. 유격수 땅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롯데 유격수 문규현의 송구가 빠졌습니다. 두 명의 주자가 모두 홈을 밟으며 7-7 동점. 그리고 다음 타자 루이스 히메네스의 역전 투런. 9-7 LG 재역전. 6회말, 롯데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정주현이 또 한 번 깊은 위치에서의 송구를 빠뜨렸고, 점수는 다시 9-9 동점. 이 경기에서 결정적인 송구를 빠뜨린 야수가 양 팀에 한 명씩이었다는 점이 묘하게 균형 잡힌 카르마처럼 느껴집니다.
7회말, 데뷔 첫 타석의 대타 나경민이 끈질긴 7구 승부 끝에 볼넷, 이어 정훈의 2타점 2루타로 11-9. 이제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8회초, 롯데의 필승조 윤길현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윤길현이 한 타자도 잡지 못하고 3실점. 박용택, 히메네스, 채은성 볼넷, 오지환 적시타. 거기에 유강남의 내야 땅볼 타점까지. 12-11 LG 재역전. 8회말, 봉중근의 초구 슬라이더를 김민하가 받아쳐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으로 다시 12-12 동점. 점수가 너무 자주 뒤집혀서 응원단장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9회말의 하이라이트는 야구가 아니라 타격 방해 판정 시비 였습니다. 1사 1루 문규현 타석에서 LG 포수 유강남이 피치아웃을 시도했는데, 문규현의 배트가 미트에 스쳤다는 판정. 심판이 타격 방해를 선언해 문규현이 1루로 살아 나갔고, LG 양상문 감독과 최정우 수석코치가 거세게 항의하며 심판과 몸싸움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코치가 퇴장당했고, 그 사이에 1사 만루까지 만들어졌지만 롯데도 이 절호의 끝내기 찬스를 잔루로 날렸습니다. 9회 만루 잔루. 야구 격언집에 새 항목이 추가될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10회, 11회까지 양 팀은 점수를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지쳐 있었고, 이 경기를 더 끌고 갈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 11회말, 1사 1·2루에서 4번 타자 황재균. 김지용의 5구째 매우 낮은 공 —그냥 두면 바운드볼이 될 만한 공—을 황재균이 절묘하게 퍼올려 중견수 앞으로 떨어뜨렸고, 전진수비를 펴 있던 LG 외야가 잡지 못했습니다. 5시간 33분의 혈투, 마침내 끝.
“5구째, 낮은 공 센터쪽으로 떨어지면서 황재균의 끝내기! 5시간 33분의 경기 결과는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입니다!!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황재균의 끝내기가 나옵니다!”
이 경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 건 다름 아닌 중계 해설이었습니다. “이런 스코어 보드는 사회인 야구에서나 나올 수 있는 핸드볼 스코어인데요.” 양 팀 합쳐 25점, 양 팀 합쳐 송구 실책 두 개, 8회초 0이닝 3실점, 9회 타격 방해 항의 중 코치 퇴장, 11회 잔루 만루, 그리고 마지막의 결과적으로 좋았던 끝내기 안타. 이 모든 일이 한 경기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를 직관한 사람들은 정확히 1년 후, 같은 자리에서 더 미친 경기를 한 번 더 봐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은 알지 못했습니다.
3위. 705 대첩 — 2017년 7월 5일, 인천 KIA vs SK#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경기에서 역전과 재역전이 모두 신기록감 이었던 경기가 있습니다. 2017년 7월 5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4시간 17분 동안 벌어진 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의 대첩이 그것입니다. MBC SPORTS+ 베이스볼 투나잇은 이 경기를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이런 경기가 있습니다! 누가 이기든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 결과적으로 이 예고는 너무도 정확했습니다.
경기는 SK의 일방적인 화력으로 시작했습니다. 1회말 한동민의 투런과 김동엽의 솔로 홈런으로 4점, 3회말 로맥의 투런 포함 4점, 4회말 한동민의 또 하나의 투런 포함 4점. 4회까지 점수는 1:12. 11점 차. 누구든 “오늘은 그냥 가비지 타임"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수입니다.
그리고 5회초가 시작되었습니다.
볼넷, 홈런, 안타, 안타, 홈런, 안타, 안타, 홈런, 안타, 홈런, 안타, 안타. 12명의 타자가 차례로 출루했고, 그중 11명이 안타를 쳤으며, 12명이 모두 득점했습니다. 4개의 홈런(최형우 투런, 이범호 쓰리런, 이명기 투런, 버나디나 투런)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단 한 이닝에 12득점. 11점차 열세가 단 한 이닝 만에 역전되어 점수는 13:12 가 되었습니다. KBO 신기록만 이 한 이닝에 여러 개가 쏟아졌습니다. 11타자 연속 안타, 12타자 연속 득점. 8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라는 세계 신기록 까지 함께 쓰였습니다. 해설을 맡은 허구연 위원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렇게 외쳤습니다.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36년째 프로야구사에 정말로 보기 힘든 장면을 보시고 계신 거에요. 와, 이게… 믿기지 않는 지금 이 상황이에요.”
11점차 역전. 이것만으로도 역대 최다 점수차 역전 신기록입니다. KIA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7회와 8회에 한 점씩 더 추가해 15:12 까지 점수차를 벌렸습니다. KIA 팬들은 이미 “역대급 역전승"의 카타르시스에 잠겨 있었고, SK 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습니다. 이게 끝인 줄 알았습니다.
8회말, 두 번째 반전이 시작됩니다. KIA 김윤동이 2사 1루에서 갑자기 제구가 무너지며 만루를 만들었고, KIA 벤치는 노장 임창용을 마무리로 올렸습니다. 2스트라이크까지 잘 몰아세운 그 공—포수가 분명히 바깥쪽으로 대놓고 앉았던 그 공이—한복판으로 말려들어갔습니다. 나주환의 방망이가 그 공을 정확히 받아넘겼고, 우중간을 가르는 싹쓸이 3루타. 주자 셋이 모두 홈을 밟으며 점수는 15:17. 재역전. 캐스터 한명재의 외침이 그날의 분위기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어~ 때렸어요! 센터쪽 중견수 뒤로 중견수~ 잡지 못… 잡지 못했습니다! 17 대 15, 나주환이 주자 세 명을 모두 불러들이면서 경기를 뒤집습니다!!”
3루타를 내준 직후, KIA 포수 김민식이 임창용이 던졌던 그 코스로 미트를 댄 채 그대로 얼어 있던 장면은 KBO 사진사(史)에 남을 한 컷입니다. 직후 임창용은 폭투까지 곁들여 추가 1실점, 점수는 15:18.
9회초, KIA가 마지막 반격을 시도합니다. 나지완이 SK 마무리 박희수를 상대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 점수는 17:18. 한 점 차.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마지막 타자 서동욱이 삼진으로 물러나며, 4시간 17분의 이 경기는 17-18 SK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기록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1점차 역전 후 재역전. 한 이닝 12득점, 11연속 안타, 12연속 득점. 17득점하고 패배한 팀(KIA), 18득점한 팀(SK). 양 팀 합쳐 35득점. 이 모든 일이 한 경기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야구라는 종목이 한 경기에 담아낼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절망의 총량을 시험한 날, 그게 705 대첩입니다. 여담으로 흥분한 한명재 캐스터는 이날 “SK 와이번스"를 발음하다가 그만 “애새끼“로 들리는 발음 사고를 내고 말았는데, 이 사건 이후 한동안 SK의 별명은 “애새끼"가 되었다는 슬프고도 우스운 사족이 붙습니다.
2위. 627 대첩 — 2017년 6월 27일, 사직 LG vs 롯데 (무박 2일)#
5시간 38분. 12회 연장. 시작 시간 18시 31분, 종료 시간 다음날 00시 09분. 이 한 줄만으로도 이 경기가 어떤 종류의 경기였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2017년 6월 27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이 경기는 KBO 역사에서 “무박 2일 대첩” 으로 회자됩니다. 시작한 날과 끝난 날이 다른 경기. 그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이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된 경기입니다.
경기는 9회까지 5-5 동점으로 흘러갔습니다. 두 팀 모두 결정력은 빈약하고 한 점도 양보하지 않는, 그저 “변비 야구"의 전형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장으로 들어선 10회초, LG가 끝낸 줄 알았습니다. 이천웅이 노경은의 초구를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기는 만루 홈런. 자신의 커리어 첫 만루 홈런이었고, 거기에 추가점까지 더해 점수는 10-5. 5점 차. 사직구장 1루 쪽 관중석은 짐을 챙겨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TV 채널은 다른 곳으로 돌려졌습니다. KBO 역사에서 연장 만루 홈런을 치고 진 팀은 그때까지 단 한 팀도 없었습니다. 결과는 사실상 정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10회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나경민 2루타, 황진수 적시타로 1점. 신본기 사구. 진해수가 등판한 후 대타 이우민의 빗맞은 타구가 1루 라인을 따라 굴러가며 행운의 내야안타. 손아섭의 밀어내기 볼넷. 무사 만루. 그리고 김문호. 진해수의 슬라이더를 정확히 받아넘긴 김문호의 타구는 우중간을 갈랐고—싹쓸이 3타점 2루타. 점수는 거짓말처럼 10-10. 동점. 캐스터 김민수의 외침은 그날 사직구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3구 타격! 걷어 올렸습니다! 우중간 우중간 중견수 뒤쪽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3루주자 득점! 2루주자, 1루주자까지 3명의 주자가 홈으로~ 홈까지 들어왔습니다!! 이 경기가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스코어 10 대 10, 10회말 다시 시작합니다!!”
여기서 끝낼 수 있었지만, 이대호가 고의4구 후 김사훈의 병살로 무사 1·2루 끝내기 찬스가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11회, 12회까지 경기는 흘러갔고,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6월 27일이 6월 28일이 되었습니다. 양 팀 모두 야수와 투수를 거의 다 소진했고, 롯데의 4번 타자 이대호는 6년 만에 3루 수비 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LG는 야수를 다 써버린 탓에 투수 이동현이 7번 타순에 들어서 타석에 서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야구의 모든 정상적인 룰이 이 시점에서 한 번씩 비틀려 있었습니다.
12회말, 이우민이 또 사구로 출루하고, 손아섭의 희생번트, 김문호의 고의4구로 만든 1사 1·2루. 타석에 들어선 전준우가 이동현의 공을 정확히 받아쳐 중견수 앞으로 보냈습니다. 보통이라면 단타로 끝나야 할 타구. 그런데 LG의 중견수 안익훈이 그 공을 뒤로 흘렸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 너무 긴 경기, 너무 지친 몸. 2루 주자 이우민이 그 사이에 홈으로 들어왔고, 5시간 38분의 무박 2일 경기는 그렇게 중견수 실책 하나로 끝났습니다. 결승타는 공식 기록상 없습니다. 이 경기의 마지막은 안타도, 홈런도 아닌, 그저 실책 이었습니다.
“전준우 초구 타격, 센터 쪽 빠집니다! 중견수 앞에 안타! 2루 주자.. 볼 뒤로 빠졌습니다! 홈으로! 홈까지! 홈까지!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2017년 6월 27일 시작한 경기 28일까지 이어졌고, 역사에 남을 롯데의 역전 승리가 끝내기로 끝납니다!”
요기 베라의 격언을 이 경기보다 더 잘 증명한 사례가 있을까 싶습니다. 연장 만루 홈런을 치고도 진 KBO 사상 최초의 팀(LG), 시작한 날과 끝난 날이 다른 경기, 5시간 38분의 사투, 마지막을 장식한 중견수 실책. 그리고 롯데가 이 경기에 투입한 투수는 무려 10명, 더 신기한 건 그들의 성씨가 모두 달랐다는 사실입니다(송·김·박·윤·장·손·배·노·차·강). 야구가 이런 디테일까지 챙길 줄 안다는 것이 이 종목의 무서운 점입니다. 한편 LG 팬들은 10회초 이천웅의 만루 홈런 직후 롯데 갤러리에 설레발성 명경기 드립을 남겼다가, 그 글이 그대로 박제되어 LG 트윈스의 흑역사가 되었다는 슬픈 후일담도 함께 남았습니다. 야구는 늘 이긴 사람의 손에는 트로피를, 진 사람의 손에는 부끄러운 캡처본을 남깁니다.
1위. 522 대첩 — 2007년 5월 22일, 광주 롯데 vs KIA#
대첩 중의 대첩, 모든 대첩의 어머니, 엠스플이 선정한 KBO 7대 대첩의 부동의 1위. 야구 칼럼니스트들은 이 경기의 장르를 정중하게 “재난영화” 라고 분류했습니다. 2007년 5월 22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4시간 47분 동안 벌어진 롯데 자이언츠와 KIA 타이거즈의 그 경기입니다.
7회까지의 경기는 너무나도 평범했습니다. KIA의 새 외국인 선발 제이슨 스코비의 한국 데뷔전이었고, 같은 날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최희섭의 홈 데뷔전이기도 했습니다. KIA가 0-4로 무난하게 앞서며 그저 그런 평일 저녁 경기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문제는 8회초였습니다. KIA는 가비지 타임을 위해 투수를 교체했지만 일이 꼬이자 당시 가장 믿을 만했던 계투 신용운을 1사 1·2루에서 투입했고, 신용운은 똑딱이 정수근에게 3점 홈런 을 헌납하며 멘탈이 무너졌습니다. 그 뒤 마무리 한기주까지 등판했지만 막을 수 없었고, KIA는 한 이닝에 무려 7실점. 그렇게 0-4가 7-4로 뒤집혔습니다. 참고로 이 와중에 롯데는 만루 상황에서 굳이 스퀴즈 번트를 시도했는데 3루 주자가 하필 이대호여서 그냥 홈에서 비명횡사하는 장면도 함께 나왔습니다. 스퀴즈와 이대호의 발은 우주의 섭리상 만나면 안 되는 조합이었습니다.
8회말, 이번엔 롯데 차례였습니다. 마무리 호세 카브레라가 등판해 2아웃을 깔끔하게 잡았는데, 1루수 이대호가 김원섭의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그냥 떨어뜨렸습니다. 동점. 카브레라는 분노했고, 그 분노를 1루 주자 견제로 풀었습니다. 동점 상황의 2사 1루에서, 카브레라는 무려 160km/h대로 보이는 견제구를 1루로 6개 연속 꽂아 넣었습니다. 다음 이닝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요. 한국 야구에서 견제구로 분풀이를 하는 외국인 투수의 표정을 본 적이 있다면, 그날 사직구장 더그아웃의 분위기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경기는 결국 연장으로 갔습니다. 12회초, 당시 KBO 규정상 마지막 이닝에서 롯데가 박준서(당시 등록명 박남섭)의 2루타로 2점을 추가해 9-7. 이대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2회말, 체력이 다 떨어진 KIA의 이왕기(이재율)가 결국 동점을 허용해 9-9 가 되었고,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는 한국 야구의 슈퍼레전드 이종범.
그리고 이왕기가 던진 공이… 이종범의 머리 를 정확히 강타했습니다.
KBO 통산 13번째 끝내기 몸에 맞는 공. 끝내기 사구. 이것이 이 경기의 결승타입니다. 야구장에서 누군가의 머리에 공을 맞춰 경기가 끝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양 팀 팬들도, 중계진도, 심지어 1루로 비틀비틀 걸어가던 이종범 본인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야구 갤러리는 즉시 이 공을 “헤딩 골든골” 이라 명명했습니다. 끝내기 헤더로 경기를 끝낸 야구 선수, 이종범. 8,082명의 관중은 환호도 절규도 못 한 채 그저 웅성거렸습니다.
이 경기의 진정한 비극은 그라운드 위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헤드샷을 던진 이왕기는 사실 그 전부터 입스(yips)로 고통받고 있었고, 이 한 경기가 그를 영원히 망가뜨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훗날 그는 은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 경기 이후 망가졌다고 하는데, 난 이미 망가져 있었다.” 이 한 문장은 522 대첩을 둘러싼 모든 농담들 사이에 박힌 한 조각의 진심입니다. 대첩은 즐거운 이야깃거리지만, 그 안에는 늘 누군가의 야구 인생이 함께 흘러갑니다.
3런 홈런, 견제구 6개, 평범 플라이 낙구, 만루 스퀴즈 비명횡사, 그리고 끝내기 헤드샷. 4시간 47분의 무등야구장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은, 그 어떤 야구 시나리오 작가도 진지하게 쓸 수 없을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경기는 1위입니다. 다른 모든 대첩이 “막장"이라면, 이 경기는 “막장의 원형” 입니다. KBO에서 어떤 새로운 대첩이 나와도, 사람들은 늘 이 경기와 비교합니다. 그리고 늘 이 경기가 이깁니다.
야구는 가끔 한 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다른 팀에게는 평생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동시에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감정이 하나의 점수판 위에서 만난 날, 우리는 그것을 대첩 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첩 위에, 522가 있습니다.
나오며: 그래서 우리는 왜 이걸 보고 있을까#
대첩의 묘미는 어쩌면 야구의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습니다. 잘 짜인 스크립트도 없고, 양 팀 모두 흠 없는 영웅도 아니며, 9회까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인간답게 무너지고, 인간답게 일어서고, 인간답게 끝없이 실수하는 그런 풍경이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야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는 순간은, 잘 던지고 잘 치는 순간보다도 이런 막장의 순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대체 뭐지” 싶다가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어제 그 경기 봤어?“를 묻게 만드는 그런 경기들. 그게 바로 KBO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매년 봄이 오면 다시 야구장으로 향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밤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대첩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여러분 응원 팀의 경기가 아니길 빌며, 그래도 혹시 그렇다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야구 인생의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될 테니까요.
여러분 모두에게 9회말 2아웃의 기적이 함께하기를.